언론보도

법률신문-신청인 손에 달린 ‘후견인 지정’… "문제 있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144회 작성일 2025.04.27

본문

[법률신 이장호 기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던 유진 박씨. 그는 2000년대 들어 우울증과 조울증 등을 앓으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박씨의 이모 A씨는 조카의 후견인으로 자신과 박씨의 고모를 지정해달라며 서울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한정후견 결정을 하면서 한 복지재단을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이후 A씨는 박씨에 대한 후견개시심판 청구를 취하했다. 이 때문에 박씨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은 무위로 돌아갔다. A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단체가 후견인으로 지정되자 청구를 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압구정동에 25억원짜리 부동산 등 30억원가량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김모(56)씨의 경우도 박씨와 비슷하다. 미혼이던 그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어 수년간 신용카드 대금과 아파트 관리비 등을 내지 못하는 등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2012년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김씨의 사촌동생인 B씨는 2015년 11월 법원에 김씨에 대한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했다. B씨는 김씨의 먼 친척인 C씨가 후견인으로서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한정후견 결정을 하면서 김씨의 후견인으로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로 정했다. 후견인 지정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B씨 역시 후견개시심판 청구를 취하했다. 이 때문에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 역시 김씨의 후견인이 되지 못했고, 김씨는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데도 후견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당사자 보호위해 "신청인 취하는
법원 허가로"… 법 개정 추진


2013년 7월 개정 민법 시행에 따라 치매노인이나 발달장애인 등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법률행위와 일상생활을 후견인이 돕는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성년후견개시심판 청구권자의 일방적인 취하로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할 수 있는 친인척들이 자신이나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후견인으로 지정되지 않으면 청구 자체를 자체를 취하해 법원의 후견인 지정을 무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성년후견이 필요한 당사자의 복리가 보호되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문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현행 제도상으로는 청구인이 취하를 하면 후견인 지정 자체가 무산돼 법원이 손을 쓸 방법이 없다"며 "제도적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사·행정소송 등 일반 사건의 경우 당사자가 사건을 취하한다는 의사를 밝히더라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취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성년후견사건과 같은 비송사건은 심판결과가 나오더라도 청구인이 심판이 확정되기 전 취하 의사를 밝히면 아무런 제약없이 취하가 가능하다.

최근 김성우(48·사법연수원 31기)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된 2013년 7월부터 지난해까지 4년여 동안 서울가정법원에 제기된 성년후견개시청구사건 중 청구인의 취하로 사건이 종결된 362건을 조사한 결과, 사건 본인(치매노인이나 발달장애인 등 후견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지칭)이나 친척 간의 분쟁으로 취하가 된 경우가 77건(21.3%), 감독 등 개입회피 목적인 경우가 15건(4.2%)으로 성년후견이 필요한 사건 본인의 복리와는 상관없는 사유로 취하된 경우가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하 사유를 알 수 없는 '사유불명'인 경우가 212건(58.5%)에 달해 친척 간 분쟁이나 법원의 감독 회피 목적으로 취하하는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부 "신청인 권리 지나치게 제한"
반론 속 제3의 방안도 모색


김 부장판사는 "자유롭게 취하를 허용하면 사건 본인의 신상과 재산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거나 이에 대한 (법원의) 개입이나 감독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이 같은 불합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성년후견개시심판이 청구된 이후 청구인이 이를 취하하려면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법무부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가사소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성년후견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도 2011년부터 후견개시청구 등은 가정재판소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취하할 수 없도록 하는 가사사건절차법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야만 취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청구인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사사건 전문가인 이현곤(48·29기) 새올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성년후견개시심판의 1심 결과가 나온 뒤에 취하하는 것을 제한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1심 결과가 선고되기도 전부터 소 취하를 제한하는 것은 청구인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철웅 한양대 로스쿨 교수도 "자신이 청구한 취지와 다르게 법원 결론이 나온 경우 이를 철회하는 것은 청구인의 권리"라며 "이를 법원이 허가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범죄에 연루될 수 있는 후견사건의 경우 검사가 바로 개입하고 범죄와는 무관하지만 복지 차원에서 우려가 있는 경우 지방자치단체에서 개입해 성년후견개시를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민법에만 성년후견 관련 규정이 있기 때문에 검사와 지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며 "성년후견 제도를 민법에만 규정해 놓을 것이 아니라, (청구인이 후견개시심판을 취하해 사건 본인의 복리 등이 사각지대에 놓일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는) 검사와 지자체장이 적극적으로 후견 사건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행정법에 근거법률을 만드는 것이 신청주의를 택한 제도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민법 제9조가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에 대해서는 본인이나 배우자, 4촌 이내의 친족 등 외에도 검사와 지방자치단체장도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검사가 서울가정법원에 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한 사건은 5건을 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자체가 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한 경우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공공후견을 청구하는 경우에 제한돼 있어 치매노인이나 뇌병변장애인에 대해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런 현실을 볼 때 후견개시가 법원 직권으로 개시될 수 없더라도, 사건 심리과정에서 사건 본인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법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처분권주의(절차의 개시, 심판의 대상과 범위, 절차의 종결에 대해 당사자에게 결정권을 갖게 하는 원칙)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